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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 기타

태국식 입헌군주제, 푸미폰 국왕의 시대 해피타이|2013.05.25 17:07|조회수 : 7215

 

 

살아있는 부처, 절대적 카리스마

 

태국의 모든 극장에서는 영화 시작에 앞서 짧막한 영상이 나온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대개 은은한 음악과 함께 오래 된 스틸사진이 스크린에 흐른다. 한 젊은 남성이 부인과 함 께 험한 시골길을 걷는다. 그의 목에는 어김없이 카메라가 걸려있다. 남성은 산간 벽지에서 맨땅에 무릎을 꿇은 채 주 민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 영상이 나올 때 모든 사람은 자 리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는 자못 숙연하다. 영상 속의 남성 은 푸미폰 야둔야뎃 현 태국 국왕이다. 이 짧은 광경은 태국 인과 그들의 ‘아버지’ 푸미폰 국왕과의 끈끈한 관계를 잘 보 여준다. 올해 86세인 푸미폰 국왕은 1946년부터 67년째 재 위 중인 태국 역사상 최장기 국왕이다. 전세계적으로도 현 역 최장수 국가원수다. 두 번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61년째 재위 중).

 

푸미폰 국왕은 현 태국 짜끄리 왕조의 9번째 왕(영어로는 라마 9세)이며, 1932년 태국에 처음으로 헌법이 제정된 이 후 세 번째 입헌군주다.
푸미폰 국왕은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살아 있는 부처’로 통 한다. 그가 오랜 시간 국민을 위해 쌓은 공덕 덕분이라는 평 가가 많다. 여타 입헌군주와 달리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카 리스마를 발휘해왔다. 재위 기간 중 태국에서는 19차례의 쿠데타와 16차례의 헌법 개정이 일어났다. 이때마다 푸미 폰 국왕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국의 균형을맞췄다. 쿠데타도 국왕의 인준이 있어야 성공한 것이다. 푸미폰 국왕의 진면모는 이 같은 영향력을 ‘부여 받은’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데 있다. 유학중이던 스위스에서 돌아와 1950년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을 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실권은 군출신인 피분 송크람 총리가 쥐고 있었다. 당시 주변 국가들은 차례로 공산화 됐다. 앞날이 불안했던 젊은 국왕은 어떻게 ‘국가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

 

 

입헌 혁명과 형의 죽음

 

푸미폰 국왕은 1927년 12월 5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2남1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쭐라롱껀 대왕(라마 5세)의 69번째 아들인 마히돌 야둔야뎃 왕자로, 하버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어머니인 몸상완(훗날 스린나가린드나 왕모)은 왕족이 아닌 평민 집안 출신이었으며, 간호원으로 일하다가 마히돌 왕자와 결혼했다.

푸미폰 국왕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대부분 외국에서 보냈다. 태어난 바로 다음 해 전 가족이 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인 1929년 마히돌 왕자가 건강 악화로 숨졌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1933년 다시 스위스로 떠났다. 이 무렵 태국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1782년 라마 1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짜끄리 왕조는 1932년 입헌 혁명으로 위기를 맞았다. 당시 국왕이던 라마 7세는 1932년 10월 태국 최초의 헌법에 서명했다. 같은 해 동북아시아에서는 일제가 만주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을 넘어 중국 본토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절대왕정에서 물러난 라마 7세는 의회와 갈등 끝에 해외로 떠났고 1935년 영국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의회는 다음 국왕으로 라마 7세의 조카였던 아난다 마히돌을 지명했다. 푸미폰 국왕의 두 살 위 형인 마히돌 왕(라마 8세)으로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었으며 당시 나이는 9세였다.

 

푸미폰 국왕의 가족은 이후로도 스위스에 머무르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귀국했다. 라마 8세는 20세의 성인이 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46년 6월 9일 왕궁에서 사망했다. 푸미폰 국왕은 형의 뒤를 이어 곧바로 왕위를 승계했으나, 태국에 머물지 않고 스위스로 돌아가 로잔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에서는 쿠데타가 벌어져 피분 송크람이 1947년 정권을 장악했다. 푸미폰 국왕이 겪을 19차례 쿠데타 중 첫 번째였다. 푸미폰 국왕은 프랑스 대사의 딸이었던 시리킷 왕비를 만나 1950년 4월 28일 결혼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5월 5일 방콕의 왕궁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렸다.

 

낮은 곳으로 임하다

 

재위 초기 푸미폰 국왕의 입지는 튼튼하지 않았다. 피분 송크람 총리는 1932년 입헌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로, 왕실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반전의 계기는 1957년 쿠데타였다. 피분 송크람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릿 타나랏은 국왕과 왕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재무부가 관리하던 왕실부동산 관리를 국왕에게 돌려줬다. 국왕의 생일이 국경일로 지정됐고, 로열바지 행렬 등 절대왕정 시대의 전통행사도 부활되기 시작했다.

푸미폰 국왕이 즉위 후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국민과의 직접적인 접촉이었다. 그는 1955년 무렵부터 지방 순방을 시작했다. 최초 방문지는 태국에서 가장 낙후된 동북부 지역이었다. 이때부터 훗날 국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3종 세트(카메라, 지도, 연필)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푸미폰 국왕 부부는 동북부뿐 아니라 북부, 남부, 서부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길이 없는 곳은 헬기를 타고 찾아갔다. 연중 200일 이상을 지방에서 보낸 적도 있었다.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국토를 밟 은 최초의 태국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푸미폰 국왕은 열악한 농촌 지역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왕개발계획’(royal project)을 시작했다. 왕실 재산과 민간 자본 등을 총동원한 태국판 ‘새마을 운동’이었 다. 로열 프로젝트는 치수, 농업, 보건, 교육 등 폭넓은 분야 에서 진행됐다. 푸미폰 국왕은 왕실의료단을 낙후 지역에 보냈으며, 아편 재배로 연명하던 가난한 북부 고산족에게는 커피 재배 및 판매의 길을 열어줬다. 농민을 위해 인공강우 개발에 성공해 특허까지 받았 으며,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던 동북부 지역을 위해 ‘푸른 이싼 계획’을 실시했다. 국왕개발계 획은 태국의 총 56개 주, 4000 여 부락에서 수십년에 걸쳐 진행됐다.

 

 

태국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충 성도는 날로 높아졌고,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도 쌓 였다. 그의 영향력이 전세계에 알려진 첫 사건은 1973년 10 월 학생 혁명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군대에 쫓기던 시위대 를 보호하기 위해 왕궁 문을 개방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 구를 지지한 것이었다. 1992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 한 수친다 총리와 시위대를 이끈 잠롱을 왕궁으로 불러들 여 갈등을 수습했다. 수친다는 그 길로 해외 망명길에 올라 야 했다. 국왕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은 모습은 태국 전역 에 TV로 중계됐으며, 태국 국왕의 카리스마가 전세계에 알 려졌다.

푸미폰 국왕은 지금껏 28명의 총리를 임명했다. 이중 그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총리로는 쁘렘 띤술라논이 꼽 힌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총리직을 맡았던 그는 국왕 제의 충실한 신봉자였으며, 지금도 ‘옹카몬트리’(추밀원, 국 왕자문기구) 원장으로 국왕을 보좌하고 있다.

 

가족과 취미 생활

 

푸미폰 국왕은 현재 건강 문제로 2009년 9월 19일 이후 입원 치료 중이다. 올해 5월 5일 열린 제 63회 대관식 기념행사 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건강은 태국의 앞날을 좌우할 주 요 변수로 꼽힌다. 푸미폰 국왕은 일부일처제를 실천한 최 초의 태국 국왕이며 시리킷 왕비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고 있다. 맏딸인 우본라타나 공주(62)는 미국인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나서 태국에 돌아와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유일한 아들인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61)는 왕위 계승 1 순위로 국왕의 각종 행사를 대신하고 있다. 셋째 시린톤 공 주(58)는 미혼이며, 온화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버지처럼 늘 카메라와 수첩을 갖고 다 니며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다. 막내인 쭐라폰 와라이락 공 주(56)는 유기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푸미폰 국왕은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재즈 연 주와 사진 촬영을 즐겼으며, 요트 항해와 설계에도 일가견 이 있었다. 집필에도 관심이 높아서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프라 마하차녹(1996)’,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이야기 를 쓴 ‘통댕 이야기(2002)’ 등의 책을 발간했다. 영어, 프랑 스, 독일어에 능통해 여러 권의 태국어 번역서도 있다.

 

글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