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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 기타

태국 현(現) 왕조의 역사(歷史 ) 해피타이|2013.05.09 22:14|조회수 : 5231

 

 

톤부리(ThonBuri)왕조에 이은 랏타나꼬씬(Rattanakosin)왕조의 개국

버마군 몰아낸 딱신 장군 차오프라야 강 너머에 톤부리왕조 개국

 

딱신(Taksin) 장군은 버마군을 몰아내고 현재의 차오프라야 강 너머인 톤부리에 수도를 세워 왕조를 열었다.  수코타이-아유타야를 계승한 톤부리왕조가 열린 것이었다. 톤부리왕조는 1767년부터 1782년까지로 15년간 단명했다. 톤부리왕조가 개국하던 해 조선은 영조 43, 중국은 청나라, 일본은 메이와 4년이었다. 톤부리왕조의 유일한 왕이었던 딱신왕은 태국을 버마로부터 독립시킨 영웅으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탁신 왕의 풀 네임은 솜뎃 프라짜오 딱신 마하랏으로 비슷한 발음 때문인지 일부 외국인은 2006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후 해외 망명중인 탁신(Thaksin) 친나왓 전 총리와의 관련성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딱신 왕은 재임기간 동안 버마의 재공습에 맞서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톤부리왕조 초기인 1770년 대에는 말레이반도,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세력을 뻗쳤다. 사료에 의하면 딱신왕조가 1대로 끝난 이유 중의 하나로 승가(僧伽)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딱신 왕을 이은 정권은 딱신 왕과 함께 버마에 맞서 함께 싸웠던 부다 쭐라록 장군이다. 그가 곧 랏타나꼬신 왕조를 연 라마 1세로 오늘날 라마 9세까지 이어오고 있는 현 짜크리왕가의 시조다.

 

쭐라록 장군 랏타나꼬신 왕조 열어 오늘까지 이르러

 

라마 1세는 몬(Mon)()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유타야 시대 왕실법정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차오프라야 짜크리란 호칭을 10년 넘게 갖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영웅에게만 붙여지는 것이었다. 라마 1세는 1782년 수도를 방콕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콕이 태국의 수도가 된 것은 올해로 231년 째다. 라마 1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궁정의식 등을 통해 아유타야 전통의 부흥을 꾀하며 정통성을 추구하였다.

 

1809년 라마1세가 별세하자 왕위는 아들에게 승계되며 왕조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 태국을 둘러싼 동남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819년엔 영국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으며, 1821년 영국은 인도총독을 보내 태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요구해 왔다.  라마 3세에서 라마 4세를 거치는 동안 태국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며 전통적인 불교와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라마 4세는 수도원에서 불교경전과 서양문물을 함께 연구하며 생활하였다고 전해진다. 라마 4세는 1855년 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으로, 1년 뒤인 1856년 이 조약을 비준할 때 ‘시암(Siam)’이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됐다. 이어 같은 해 미국과 프랑스,  2년 뒤인 1858년에는 덴마크와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라마 4세는 영국인 가정교사 애나 레오노웬스(Anna Leonowens)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왕과 나(Anna and the King)’의 주인공이다.

 

한국은 태국보다 30여년 늦은 고종 19년인 1882년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68년 라마 4세였던 몽꿋 왕이 사망하자 당시 15세 였던 몽꿋 왕의 큰 아들 쭐라롱껀이 왕위에 올랐다. 라마 5세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에 상주공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12개 부로 구성되는 내각제도를 도입했고, 국민개병제, 초등교육 의무화 등도 실시했다.  라마 5세는 태국에 ‘국가-종교(불교)-왕’ 이념을 확립한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라마 5세의 장남인 와치라웃 왕자가 라마 6세를 이었는데 그는 영국 육군사관학교와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첫 해외유학파 국왕이었다. 라마 6세의 재임기간 이던 1917년 태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국제연맹의 창설 회원국이 되었다. 태국은 1913년 성씨제도를 도입했고, 1916년에는 쭐라롱껀대학을 설립했다. 국기를 제정하고 국가 공휴일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라마 7세로 태국 절대왕정 종식, 입헌군주제로 돌입

 

1925년엔 라마 6세의 동생 프라차티뽁이 라마 7세를 이었다. 라마 7세는 태국 절대왕정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당시 그가 통치하던 1920년 대 후반은 세계 대공항이 발생하는 시기였으며 태국도 극심한 재정난으로 곤란을 겪었다. 당시 유럽에서 공부한 군인과 소장관료들이 주도가 된 이른바 입헌혁명으로 태국은 절대왕정을 막을 고하게 됐다. 라마 7세는 1935 3월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퇴위를 발표했다.

 

라마 8세인 마히돌 왕은 라마 7세의 조카로 쭐라롱껀 왕의 69번째 아들인 마히돌 야둔야뎃 왕자의 장남이다. 현 라마 9세인 푸미폰 야둔야뎃 국왕의 형.  스위스에 있던 마히돌은 9세 때인 1935년 태국 국회에 의해 국왕으로 지명됐으며 1945년 태국으로 돌아왔다.  1년 뒤 의문을 죽음을 맞자 2살 뒤의 동생인 푸미폰 야둔야뎃 현국왕이 왕위를 이었다.

 

스위스에 있던 푸미폰 국왕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학업을 계속하다 1950 5월에 귀국해 대관식을 거행했다. 라마 5세가 푸미폰 국왕의 할아버지인 것을 감안하면 태국은 3대에 걸쳐 5명의 왕이 통치한 셈이다. 푸미폰 국왕은 1927 12 5일생으로 올해 86.  태국 역사상 최장기간인 67년 째 국왕의 자리를 이어오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최장기 국가원수로 기록되어 있다. 푸미폰 국왕은 1967년 이후엔 외국 방문을 중단하고 농촌복지 사업 등 국민을 위해 헌신해 태국 국민의 큰 존경을 받고 있다.

태국역사는 왕가의 변천사라고 할 만큼 태국의 왕은 오늘까지도 태국인과 태국문화를 깊숙이 이해하는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랏따나꼬신 왕조

 

 

왕명

재위기간

라마 1

프라풋타엿화쭐라록

1782-1809

라마 2

프라풋타럿라나파라이

1809-1824

라마 3

프라낭끌라오짜오유후어

1824-1851

라마 4

프라쩜끌라오짜오유후어

1851-1868

라마 5

프라쭌쩜끌라오짜오유후어(쭐라롱껀)

1868-1910

라마 6

프라몽꿋짜오유후어(와치라웃)

1910-1925

라마 7

프라뽁끌라오짜오유후어(프라차티뽁)

1925-1935

라마 8

프라짜오유후어아난타미히돈(마히돈)

1935-1946

라마 9

프라짜오유후어푸미폰아둔야뎃(푸미폰)

1946~현재